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
지난 24일 WTO 협상의 최고기구인 무역협상위원회(Trade Negotiation Committee)에서 라미 사무총장은 DDA(Doha Development Agenda, 도하라운드)협상의 중단(suspend)을 선언했다.
라미 사무총장은 하루 전인 지난 23일 하루 종일 쟁점분야에 대해 입장을 좁히려고 주요국들과 마라톤 회의를 했지만 각 국간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협상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지만 막상 결정이 되고, 이 결과가 가져올 파장을 생각하면 엄청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과거 WTO협상은 많은 고비를 넘기고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공식적으로 협상을 중단한다고 선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주가 협상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고비였기 때문에 결렬 선언 다음날인 지난 25일 제네바로 출발하려던 우리 대표단은 이 소식을 접하고 갑자기 일정을 취소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한편 라미 사무총장은 "협상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며 여건이 조성되면 협상을 다시 재개할 것"이라며 "DDA협상이 실패하면 세계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보호주의가 팽배해 세계화 시대에 흐름을 역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말 나트 인도 상공장관은 "사람으로 치면 중환자 또는 사망 상태(between intensive care and crematorium)"라며 이번 협상 중단의 심각성을 말했다.
DDA협상은 지난 2001년 11월 시작된 뒤 벌써 5년 여의 세월이 흘렀다. 당초 2004년 말 끝낼 예정이었지만 이미 시한을 넘어섰다. 지난해 12월 홍콩 각료회의에서는 올해 말까지 협상을 끝내야 한다고 선언하고 올해 일정을 정했다.
그렇지만 올해 들어서도 입장 대립이 계속되자 지난 5월부터 올해 시한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돌았다. 이에 사무총장은 각 협상그룹 의장에게 마지막 합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했다.
대개 협상은 영향력이 있는 그룹을 대표하는 국가들이 모인 주요국 회의에서 먼저 합의한 뒤 이를 모든 국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논의하면서 비 주요국들의 주장도 반영해 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각 협상그룹 의장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요국 간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특히 농업협상과 비농산물협상(NAMA, Non Agricultural Market Access)이 핵심인데, 이들은 서로 연계돼 있어 농업부문이 합의돼야 비농산물이 합의될 수 있다.
농업협상 의장은 지난 5월 초부터 타결을 모색했지만 소득이 없었고, 지난 6월 말 주요국 각료들이 모였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달 들어 라미 사무총장은 G8정상회담까지 찾아가서 선진국들이 리더십을 발휘해 신축적인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 호소했다. G8 정상들은 겉으로는 이런 부탁을 받아들였지만 막상 제네바에서는 전혀 바뀐 게 없었다. 이에 라미 사무총장은 현 상태에서 협상을 계속 진행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따라 협상중단을 선언했다.
WTO의 다자무역협상(multilateral trad negotiation)은 광범위하고 복잡한 이슈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WTO의 전신인 GATT 초창기 시절에는 회원국 수도 적었고 주로 공산품 관세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협상 내용이 단순했다. 그러나 회원국 수가 늘고 관세뿐만 아니라 여러 비관세 장벽을 다루고 최근에는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 무역원활화 등 포괄범위가 넓어지면서 협상도 복잡해졌다. 물론 모든 회원국이 다자무역체제를 통해 공통된 규범과 질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WTO가 중요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업은 산업특성상 1970년대까지 자유무역에서 한 발짝 비켜있었다. 그러나 농업에 대한 과도한 지원이 무역을 왜곡시킨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1980년대 중반 UR(우루과이라운드)에서 처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농업은 모든 나라에게 민감한 분야지만 갈수록 불어나는 농업보조금, 높은 무역장벽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협상테이블에 오른 것이다. UR협상이 8년이나 계속된 것도 농업 때문이었다.
DDA협상의 최대쟁점도 농업이다. 농산물수출국과 수입국, 선진국과 개도국간 극명한 입장차는 농업보조금과 농산물의 관세 감축이 핵심이다.
무역왜곡보조금을 줄여야 한다는데 반대하는 국가는 없지만 어느 정도 줄일까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가 되지 않는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확실한 시장개방이 보장되지 않으면 보조금을 줄일 수 없다고 버티고 있어 많은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반면 관세감축은 미국이 가장 적극적이었지만 EU와 농산물 수입국들이 반발하고 있다. 현재 논의되는 관세감축안은 UR보다 더 폭이 크다. 그런데도 미국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개도국들은 농민들의 빈곤, 식량안보 등을 이유로 상당 품목에 대해 관세감축예외를 요구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주요 품목 대부분을 예외로 인정하면 실질적인 무역증대효과가 없다며 반대한다.
이렇게 협상이 교착된 이유 중 하나는 당초 너무 의욕적인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미 UR에서 상당 수준 개방했는데 더 많이 개방해야 한다는 목표에 대해 회원국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수출국들의 지나친 의욕이 오히려 협상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각 국의 국내 사정도 협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특히 미국 농업계는 보조금이 공격받자 확실한 시장개방을 보장하지 않는 한 미국 국내정책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해 협상대표들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봉쇄해 버렸다.
현 시점에서 언제 다시 협상이 시작될 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이번 협상이 중단된 가장 큰 원인은 오는 11월로 예정된 중간선거 때문에 미국이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중간선거 이전에 협상이 재개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미국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부여받은 무역협상권한(TPA, Trade Promotion Authority)은 내년 6월 말 끝난다. 하지만 의회가 무역협상권한 연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 내에는 협상이 타결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WTO체제가 약화되는 것이다. WTO체제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강력한 분쟁해결 수단이다. 그런데 WTO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면 힘센 국가들은 WTO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WTO 이전 시대처럼 미국의 슈퍼301조 같은 수단이 횡행하고 양자 차원의 통상 압력이 가중될 것이다.
무역 규모가 작거나 협상력이 약한 나라들은 WTO체제가 큰 보호막이 되지만 WTO체제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황야에 혼자 내버려진 꼴이 될 것이다. 또 이번 협상중단으로 양자체제인 FTA에 관심이 커질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개방의 흐름이 대세인 만큼 모든 나라들이 앞다투어 양자 또는 지역협정을 체결하려 할 것이다. 특히 이번 협상 중단이 한미FTA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FTA에 대한 관심이 커짐에 따른 간접적인 영향은 받을 것이다.
끝으로 협상 중단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협상 중단은 모든 회원국들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미 사무총장은 마지막 회의에서 "오늘은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패자이다(There are no winners and losers in this assembly. Today, there are only losers.)"라고 말했다.
세계경제의 발전과 가난한 개도국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나아가 우리 경제의 성장을 위해 협상은 재개되고 반드시 타결돼야 한다.
농업 분야가 문제지만 어차피 개방은 WTO협상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개방이 거부할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라면 FTA같은 양자체제보다는 WTO의 다자무역체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우리 역시 중단된 협상이 빠른 시일에 재개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글/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