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훼철·복설 반복 ‘자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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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훼철·복설 반복 ‘자산서원’ 영산강 물길 따라(19)
  • 기사등록 2023-09-09 09:11:48
  • 기사수정 2023-11-04 08: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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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함평천교를 지나면 무안군 몽탄면 봉산리다. 몽탄면(夢灘面)은 무안군 동부에 있는 면으로 쌀·보리·고구마·양파 등 농업이 주를 이룬다. 영산강을 이용한 수산업도 활발해 장어와 숭어 어획량도 많다.

 

봉산리(鳳山里)는 사방이 모두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신설포나루를 통해 나주시의 넓은 평야와 접해있는 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기동(基洞), 옥반동(玉盤洞), 기룡동(騎龍洞)마을 등이 있다.

 

자산서원 대도문(외삼문).오전을 마감하기 전에 엄다면에 있는 자산서원으로 차량 이동한다. 자산서원(紫山書院)은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으로 불리는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된 정개청(鄭介淸, 1529∼1590)이 유배 중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1616년 건립했다. 1678년 조정으로부터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계속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훼철과 복설(復說)을 되풀이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그에 대한 포폄(褒貶)도 기복을 겪는다. 호남지방의 사류들이 다수 이 분쟁에 관련돼 조선 후기 정치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1957년에 복설된 뒤 1988년 대규모의 복원공사를 거쳐오늘에 이르렀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제146호)로 지정된 정개청 문집 ‘우득록(愚得綠)’ 목판이 소장돼 있다.

 

곤재 우득록 목판.

곤재우득록목판 (困齋愚得錄木版)은 곤재 정개청의 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1689년(숙종 15)에 왕의 특명으로 시작돼 1692년(숙종 18)에 완성된 목판이다. 목판은 감나무를 기름에 튀긴 특재(特材)라고 전한다. 우득록은 본편 3권과 부록 2권 등 총 5권으로 모두 334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목판은 원래 총 108매로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48매만이 전한다. 이 책은 호남 사림의 동향과 인맥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자산서원묘정비.

정개청은 자 의백(義伯), 호 곤재(困齋)이고 나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이후 보성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유학, 천문지리, 약학, 산수, 역학 등을 공부해 학문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41세에는 지금의 제동마을에 윤암정사(輪巖精舍)를 짓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으며, 1590년 기축옥사로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에 유배됐다가 병사했다. 서원에는 정개청과 참봉을 지낸 그의 동생 정대청(鄭大淸)을 배향하고 있다.

 

점심식사 후에는 무안의 식영정으로 간다. 이곳 무안사람들은 영산강을 ‘사호강’ 또는 ‘곡강’이라 한다.

 

‘사호강(沙湖江)’은 가뭄에 물이 말라 모래사장처럼 변한 모습을 말하는 것 같다. 범람이 잦았다는 것은 비옥한 농토라고 할 수 있지만, 바꿔 말해 홍수와 가뭄 등으로 잦은 피해가 있다는 지형이다. 실제로 최근까지 영산강은 국내의 대표적인 수해지역으로 자주 거론된 적이 있다. 또 다른 이름인 ‘곡강(曲江)’은 사행천(蛇行川)처럼 곡선(曲線)을 이룬다는 뜻 같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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