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나주향교’, 성균관 다음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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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나주향교’, 성균관 다음 규모 영산강 물길 따라(12)
  • 기사등록 2023-08-13 08:09:50
  • 기사수정 2023-12-24 18: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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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토계동(土界洞)은 원래 나주군 동부면(東部面)에 속했으며, ‘토계촌’ 또는 ‘토끼촌’이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교촌이 통합됨에 따라 토계리가 됐다. 1931년 11월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나주읍 토계리가 됐다. 1981년 7월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해 금성시(錦城市)가 되고, 동제(洞制) 실시로 금성시 토계동이 됐다가 1986년 1월 나주시로 개칭되면서 나주시 토계동이 됐다. 이 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송월동(松月洞) 관할이다. 천년고도인 나주에는 볼거리가 너무 많아 잠시 걷기를 멈추고 차량으로 이동한다.


나주시 동문 밖 석재당간(石材幢竿, 보물 49)은 길고 가는 석주(石柱)의 상·하면을 반씩 깎아 내어 접착시킨 형식의 높이 11m 당간이다. 나주의 지세가 배 모양이어서, 배가 뒤집어지지 않고 안정되기를 빌기 위해 돛대의 의미로 이 당간을 세웠다고 전한다. 화강암으로 만든 당간지주는 마주보는 안쪽 면은 물론 바깥 면이나 옆면에도 아무런 조각이 없는 간결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정상 부분의 윗면은 평평한 편인데, 바깥 면 가까이에 이르러 둥글게 곡선을 그리면서 바깥 면과 접하는 모서리를 깎아냈기 때문에, 앞뒤에서 보면 곡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나주목사고을시장에 들러 시장구경을 하고 전라남도유형문화재(제128호)로 지정된 나주향교로 간다. 나주(羅州)는 전주(全州)에 이어 천 년을 이어온 전라도(全羅道)의 중심축에 있는 고을이라 향교의 규모도 서울의 성균관 다음으로 크다. 향교(鄕校)는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한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공자를 중심으로 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며, 지방인재를 교육하고 교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기관이다. 사립교육기관으로는 서원(書院)이 대표적이다.


나주향교(羅州鄕校)는 987년(고려 성종6) 8월에 창건돼 1398년(태조 7)에 중수됐다고 전해진다. 향교나 서원의 건물 배치는 지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평지인 경우에는 전묘후학(前廟後學)배치 구조로 제사지내는 공간이 앞에 있고, 학문을 배우는 공간이 뒤에 있다. 경사진 경우에는 그 반대로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한다. 평지인 경우에는 제향공간을 강학공간의 앞쪽에 두어 제향공간의 위상을 높게 하고, 경사진 곳은 반대로 제향공간을 보다 높은 터에 두어 높은 위상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나주향교의 구조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진 외삼문이 먼저 나오고 내삼문을 통해 대성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으나 이 문은 내삼문과 함께 굳게 닫혀 있어 우측으로 돌아가 평소에는 측문인 영난문(迎欄門)을 이용한다. 대성전은 향교의 중심 건물로 공자(孔子)를 비롯한 4명의 성인과 주자(朱子)를 비롯한 송조사현(宋朝四賢), 우리나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등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 총 27위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봄가을에 석전대제(釋奠大祭)가 거행된다.


                             ▲나주향교 명륜당.


대성전 뒤에 있는 명륜당(明倫堂)은 스승과 학생이 모여서 공부하는 자리다. 일반적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는데, 이는 명륜당이 교육장소인 동시에 스승의 거처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국의 향교 가운데 나주향교는 서울 성균관의 명륜당을 모방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즉 중앙에 세 칸의 건물이 있고, 양쪽으로 세 칸의 날개 건물인 익사(翼舍)를 두었는데, 성균관과 다른 점은 건물 사이에 약간의 사이를 둔 것이다.


                          ▲나주향교 서재(기숙사).


명륜당의 ‘명륜(明倫)’이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이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두어 교생들의 기숙사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과 관계없이 양반은 물론 양인의 자제도 입학할 수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문과공부를 주로 하던 양반자제들은 동재를, 무과나 잡과를 공부하던 양인자제들은 서재를 사용했다. 성균관이나 향교에 가면 은행나무가 있는 이유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양성했다는 유래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나주향교 충복사유허비.


1597년(선조 31) 당시 대성전 수복(首僕)이었던 김애남(金愛南)이 정유재란으로 향교가 없어질 위험에 처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위패를 금성산으로 옮겼다가 왜병이 물러간 뒤 다시 안전하게 봉안하게 됐다고 해서 그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도록 했다는 내용의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가 있다. 현종·숙종 때에도 중수와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전은 이때 중수된 듯하며, 성균관의 명륜당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됐을 때 나주향교의 명륜당을 참고했다고 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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