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임진왜란 결사항전 ‘작원관’
기사 메일전송
<와야(瓦也) 연재>임진왜란 결사항전 ‘작원관’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41)
  • 기사등록 2023-02-04 09:10:55
  • 기사수정 2023-12-23 23:48:25
기사수정

【에코저널=서울】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길을 삼랑진 쪽으로 바삐 움직인다. 비옥한 밀양강변 비닐하우스가 풍요를 약속하는 것 같다.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낙동강 ‘딴섬’이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중심으로 낙동강 3경인 ‘낙동강 딴섬 생태누리’가 조성돼 있다. 제3경은 ‘삼랑진읍’을 중심으로 조성돼 있는데, 세 갈래 물줄기가 굽이치는 삼랑진억새군락의 ‘은빛 물결의 일렁임’을 이야기한다. 삼랑(三浪)은 세 개의 물결인데 낙동강에 밀양강이 합치고, 낙동강의 밀물과 썰물을 두 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합류하는 지점 위로는 경전선 낙동강철교가 강을 가로지른다. 경전선(慶全線)은 삼량진역과 광주송정역을 연결하는 총길이 277.7㎞다. 원래 단일노선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라 마산선·진주선·광주선 등이 합해져 지금의 경전선이 됐으며, 경상도와 전라도 두 도의 첫 글자를 따 이름 지었다. 1905년 삼량진∼마산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1968년 삼량진∼광주송정 구간이 완전히 개통됐다. 이후 복선화 사업이 추진돼 2010년 삼량진∼마산, 2012년 마산∼진주, 2016년 진주∼광양의 복선 구간이 개통됐다.


                         ▲삼랑진의 왜식 적산가옥.


조선시대 삼랑진의 행정지명은 하동면이었다. 단순 방위 표시에 불과한 하동(下東) 지명이 지리특성이 잘 드러나는 삼랑진(三浪津)으로 고쳐진 때는 1905년 삼랑진역이 들어선 이후다. 삼랑진이 유명해지면서 1928년에야 공식 행정지명으로 사용하게 됐다. 조선시대에 자연지명으로 삼랑(三浪), 인문지명으로 삼랑진(三浪津)이 존재했으나, 행정지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다가 일제강점기에 개칭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수탈기지여서 그런지 적산가옥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삼강서원.


삼랑진 낙동강 변에는 민구령(閔九齡), 민구소(閔九韶), 민구연(閔九淵), 민구주(閔九疇), 민구서(閔九敍) 등 우애가 남달랐던 민씨(閔氏) 오형제를 배향(配享)한 삼강서원(三江書院)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인 민구령(閔九齡)이 1510년(중종5)경에 삼랑루(三郞樓)가 있던 자리에 오우정(五友亭)이란 정자를 짓고, 4명의 아우들과 더불어 5형제가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던 곳에 서원이 들어섰다.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1979년에 14세손 민병태(閔丙兌)의 주선으로 사당을 다시 지어 삼강서원의 현판을 걸었다.


한때 인파로 북적거렸을 경전선 낙동강역(洛東江驛)은 폐역이 되어 잡초만 무성하고, 문희숙시인의 시 <낙동강역에서>만 “휘슬소리 끊으며/전라행 막차는 가고/긴 내 그리움도 그때/창백한 진주로 간다/(중략)/허물어진 먼 거리의/아름다운 사람들아/나는 또 눈뜨고 사공이 되어/도요새 발자국 찾아 모래강을 저어간다”던 낙동강역이 1905년 12월에 개업해서 2010년 11월 폐역이 되어 잡초만 무성한 채 도요새 발자국도 없는 낙동강을 외면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 사방이 안개가 자욱하다. 버스로 삼랑진역까지 이동해 다시 낙동강을 따라간다. 삼랑진읍에 위치한 삼랑진역은 경부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밀양역과 원동역 사이에 있다. 경전선의 시발역으로 1905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고, 1999년 12월 역사를 신축했다. 무궁화호가 운행되고, 여객, 화물, 승차권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코레일(Korail) 소속이며, 역의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경부선에서 경전선으로 분기된다. 경전선을 따라 한림정역으로 연결된다.


삼랑진역을 지나 낙동강변으로 들어가자 오토캠핑장이 안개 속에 자욱하다. 캠핑장에는 어젯밤에 캠프를 차린 자동차들도 아직 미명(未明)이다. 삼랑진 안태리에서 발원해 안태호를 지나 검세리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안태천(安台川)도 운무(雲霧)에 싸여 고요하다. 안태천은 하천 중류의 안태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안태리는 옛날 밀양군 내에서 풍수지리학상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안태’로 꼽을 만큼 구천산과 천태산이 좌청룡 우백호로 감싸고 있어 안과태평(安過泰平)한 마을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작원관 비각.


안태천이 유입되는 곳 부근에는 작원관 터가 나온다. 삼랑진읍 검세리에 있는 작원관지(鵲院關址)는 경남문화재자료(제73호, 1983년 7월)로 지정됐다. 이곳은 영남(嶺南)지방의 동서와 남북을 잇는 요로(要路)의 역원(驛院)인 작원관의 옛터로 ‘까치원터’라고도 한다. 작원관은 고려시대부터 왜적의 침공을 방비하던 요새지로 고려 고종(高宗) 때 창건했다. 비각 안 중앙에는 ‘작원관원문기지비’가 있고 좌우로 ‘작원진석교비’와 ‘작원대교비’가 있다.


작원관은 공무출장 중인 관원들의 숙박기능을 하는 원(院)과 함께,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기능인 관(關), 작원진(鵲院津)이라는 나루터 구실 등 원(院)·관(關)·진(津)의 역할을 겸했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밀려드는 왜적을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을 펼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철도를 부설하면서 다른 곳에 이전·복원했으나, 낙동강 대홍수로 유실됐다. 1939년에 밀양군에서 비(碑)만 설치했으며, 1995년 이곳에 작원관지(鵲院關址)를 복원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관련기사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3-02-04 09:10:55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동해 품은 독도’ 촬영하는 박용득 사진작가
  • <포토>‘어도를 걸을 때’
  • 설악산국립공원 고지대 상고대 관측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