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사육신 중 유일하게 후손 살아난 ‘박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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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사육신 중 유일하게 후손 살아난 ‘박팽년’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25)
  • 기사등록 2022-12-10 09:58:00
  • 기사수정 2023-12-24 09: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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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덕포대교와 반지천(磻旨川)을 지난다. 다리 밑은 어김없는 쉼터였고, 우리의 모습은 그늘을 찾아 길을 떠나는 순례자와 같다.


경부선 KTX 낙동강철교 위로 고속열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요란하다. 제67호 국도변에는 ‘왜관지구전적기념관’과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이 한국전쟁 때 최후의 낙동강방어선이었던 55일간의 전투가 떠오른다. 두 기념관은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일깨워 주는 교육의 현장이다.


              ▲홍살문을 중심으로 좌측이 육신사, 우측은 태고정.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육신사(六臣祠)로 이동한다. 육신사는 조선 세조(世祖) 때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거열형을 당한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 등의 사육신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에는 충정공 박팽년의 후손들이 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사당을 지었으나, 현손인 박계창이 충정공의 제삿날에 사육신들이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뒤부터 나머지 분들의 음식도 장만해 함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육신사.


사육신은 3대가 멸했기 때문에 후손이 없는 게 십상인데, 유일하게 박팽년만 후손이 살아남아 대를 잇게 됐다. 이는 박팽년(朴彭年)의 둘째 아들 순(珣)의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도 관비(官婢)가 되어 고향인 경상도로 내려와 살았는데 집의 몸종과 함께 임신 중으로, 그 후 이씨 부인은 아들을 낳고 몸종은 딸을 낳았다. 이때 아이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고 비밀리에 여종이 낳은 딸과 바꿔 길러서 기적적으로 사육신 중 오직 하나 박팽년의 혈손(血孫)만이 남아 대를 잇게 됐다.


박비(朴婢)가 17세 되던 해에 이곳에 부임해온 이모부인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戟均)의 권유 따라 자수하여 성종(成宗)으로부터 사(赦)함을 받고 박일산(朴一珊)이란 이름까지 하사받아 고향에 내려오게 됐다. 박일산은 후손이 없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99칸의 종택(宗宅)을 지었으며, 종가 안에 붙어 있던 별당건물이 태고정(太古亭)이다. 이를 계기로 묘골은 순천 박씨 집성촌(集姓村)이 됐으며, 근세 대표적인 인물로는 국회의장을 지낸 9선의 박준규(朴浚圭, 1925∼2014)가 직계후손이다.


묘골의 지형은 ‘팔공산을 머리로 하는 거대한 용이 자신의 꼬리를 돌아보는 회룡고미(回龍顧尾) 형국’이다. 묘골 너머에 ‘파회(巴回)’라는 마을이 있는데, 산줄기가 ‘巴’자 모양으로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巴’ 자의 윗부분의 네모 둘은 왼쪽이 파회(巴回) 마을이요, 오른쪽 네모는 묘골 마을로 이 두 마을의 출입구는 동남쪽 트인 부분으로만 보이고, 나머지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도 안에서도 이 마을을 들여다보거나 내다 볼 수 없다고 한다.


                                     ▲태고정.


묘골마을에는 육신사와 보물 제554호로 지정된 태고정을 비롯해 대구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도곡재(陶谷齋) 등이 있다. 이 마을에는 우리나라 굴지 기업의 창업자 이병철(李秉喆, 1910∼1987)의 부인 박두을 여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삼성이 성장하기까지는 박두을 여사의 훌륭한 내조덕분이라는 칭송이 따라 다니는데, 요즈음 재벌부인들의 시끄러운 사회적 현상에 교훈이 될듯하다. 한 때 수 백여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이농(離農)현상 등으로 닫힌 문이 많으며, 30여 호만 사람이 거주한다고 한다.


파회마을로 이동해 ‘삼가헌(三可軒)’으로 간다. 삼가헌은 묘골마을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고 있는 이 마을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주택이다. ‘삼가헌’이라는 이름은 박팽년의 11대손 박성수가 1769년(영조45)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면서 부르게 됐다. 대문을 통해 들어선 사랑채는 전면 5칸 측면 4칸의 ‘ㄴ’자형 건물이다. 작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예의염치효제충신(禮義廉恥孝悌忠信)’ 예서체의 글씨가 걸려 있다.


서측 일각문 위로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연꽃을 심은 아름다운 파산서당(巴山書堂)이 자리하고 있다. 파산서당은 후학들을 가르치던 ‘一’자형 건물이었으나, 가운데 한 칸의 마루를 두고 양편으로 방을 두었는데 이 방들은 툇마루를 통해 출입토록 되어 있으며, 1874년에 서쪽 끝 방 남쪽으로 연지(蓮池)를 향해 ‘ㄱ’자로 돌출된 누마루를 두었다. 이 돌출된 누마루가 하엽정(荷葉亭)이다. 연못은 장방형으로 만들고 가운데에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 여기서 방형의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원형의 섬은 하늘을 상징하는 우리 전통우주사상인 ‘천원지방형(天圓地方形)’이다.


태고정과 하엽정을 둘러보고 칠곡보 근방으로 나와 낙동강을 따라간다. 4대강사업으로 건설된 칠곡보는 함께 건설된 다른 보들과 마찬가지로 물의 흐름을 막아 수질오염을 심화시킨다는 여론과 보고가 있어 존폐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칠곡군에서는 2012년 완공 이후 칠곡보 주변에 대규모 수변생태공원을 조성했으며, 바닥 분수와 물놀이 시설 등 친수 공간을 조성하고 편의시설 등을 설치했다고 한다.


보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낙동강물의 흐름은 느리게 보이고, 햇볕에 반사되는 물빛도 제 색깔이 아닌 것 같다. 한국전쟁 당시 피아(彼我) 간에 혈전을 벌였던 ‘호국의 다리(구 왜관철교)’ 부근에도 그 때 그 핏빛이 보이는 것 같다. 구 왜관 철교는 한국의 역사와 더불어 변천해 왔다. 1905년 경부선의 개통과 더불어 단선 철교인 낙동강 대교(洛東江大橋)로 출발했다.


경부선의 복선화와 더불어 1941년 11월 30일, 이곳에서 100m 상류부에 새로운 노선과 교량이 가설되면서, 기존의 철교는 기차의 통행이 폐쇄되고, 국도 4호선의 도로 교량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구 철교(舊鐵橋) 또는 인도교(人道橋)라고 불렀으며, 사람·가축·마차·차량까지 모두 인도교를 통해 낙동강을 건널 수 있게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낙동강이 최후의 저지선이 되어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왜관에서 두 번째 교각이 유엔군에 의해 폭파됐다. 1953년 휴전 후 폭파된 구간을 목교(木橋)로 연결해서 다시 인도교로 이용했으며, 1970년에는 국도 4호선의 교량으로서 왜관교가 가설됨으로서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원활해졌다. 2008년 10월 구 왜관 철교는 ‘칠곡왜관철교’로 제406호 등록 문화재가 됐다.


호국의 다리 하류에는 옛 ‘왜관나루터’자리가 있다. 왜관(倭館)은 조선 시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외교·통상을 하며 무역 등의 기능을 가진 곳을 왜관(倭館)이라고 했다. 칠곡군 왜관의 명칭은 왜관 언저리에 조선 성종 때부터 낙동강 하류에서 뱃길을 따라 올라온 왜물(倭物)을 서울로 실어가기 전에 보관해 두었던 창고인 왜물고(倭物庫)가 위치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 지금의 왜관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붙인 이름이고, 원래의 왜관은 낙동강 서안 쪽의 ‘구왜관(舊倭館)’으로 부르는 지금의 약목면 지역이다.


왜관나루터는 낙동강유역에서 가장 번창한 나루터 중의 하나로, 1939년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단선철교가 인도교로 이용되기 전까지는 물류수송의 중요한 통로였다. 농수산물을 비롯한 각종 물산이 부산에서 올라와 하역했을 뿐만 아니라 상류인 상주와 안동에서 교역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가 성황을 이뤄 선창가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제2왜관교 아래로 동정천(同廷川)이 합류하는 낙동강이 햇살에 반짝인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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