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하회마을 지형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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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하회마을 지형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15)
  • 기사등록 2022-11-05 09:15:24
  • 기사수정 2023-12-24 09: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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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이어지는 십리길(4㎞)은 학동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하며 거닐던 길이었다. 유교문화길(2코스 화회마을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길 같다.


시인 안도현(安度眩)은 그의 시 ‘낙동강’에서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그것은 어느 날의 선열처럼 뜨겁게”라고 읊었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그냥 뜨겁게 우러나오는 선열이 아니라 ‘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라고 하고 싶다. 낙동강을 흐르는 물은 차가운 육신을 덥히는 뜨거운 피다.


그 낙동강을 끼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내 마음 띄워 보낸다. 짙게 채색되는 녹음 속을 헤치며 나무들과 눈 맞추고, 오래보면 더 예쁜 들꽃들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벌써 열매를 맺은 오디와 버찌들과 입을 맞춘다. 이 길을 걸었던 선비의 걸음걸이는 어떤 걸음걸이였을까?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강바람에 휘파람을 날리며 화산자락을 벗어나면 모내기가 막 끝난 하회마을 논바닥에는 벼들이 뿌리를 내린다.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으며, 국가민속문화재(제122호, 1984년1월10일)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은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하회리(河回里)에 있는 민속마을로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유씨(豊山柳氏)의 씨족마을이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태극형(太極形)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 형국이다.


하회마을의 중앙에는 삼신당(三神堂)이 있다. 하당(下堂)으로도 불리며, 입향조(入鄕祖)인 류종혜(柳從惠)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높이 15m 둘레 5.4m의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다. 마을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고 소망을 비는 곳이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를 상당과 중당에서 지내고 그 다음 아침에 여기서 제를 올린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된다. 상당(上堂)은 화산 중턱의 서낭당이고, 중당(中堂)은 국사당이다. 나무를 잘못 건드리면 동티가 난다는 속설도 있다.


류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낙동강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위쪽은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남촌의 충효당(忠孝堂)이 대표적인 건물로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 중심부에는 류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2개의 문화가 병존한다고 한다.


                                 ▲하회마을 큰길.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하회마을로 들어와 처음 지은 집으로 유서가 깊다.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내려왔고 대종택답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문중의 모임을 이곳 사랑채에서 갖는다고 한다. 양진당(養眞堂)이라는 이름은 풍상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영(柳泳, 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사랑채의 현판 입암고택(立巖古宅)은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호 입암(立巖)에서 따왔다.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17세기에 지어졌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충효당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데서 유래한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柳相祚)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지은 것이며, 충효당(忠孝堂) 현판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년∼1682년)의 글씨다.


넓은 마을의 곳곳을 둘러본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대충 중요한 것만 보고 부용대가 보이는 곳으로 서둘러 강변 만송정 솔숲으로 나온다. 천연기념물 제473호(2006년11월27일)로 지정된 만송정(萬松亭)은 서애(西厓)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柳雲龍, 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어서 만든 솔숲을 만송정(萬松亭)이라 하며, 현재의 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낙동강과 부용대.


만송정에서 4월이 되면 벚꽃 터널을 이룰 강둑을 지나 바삐 풍천면 광덕리 부용대 입구로 이동해 우선 겸암정사에 들른다. 겸암정사(謙嵓精舍)는 류운룡이 1567년(명종22)에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을 위해 지은 곳이다. ‘겸양’은 그의 스승 퇴계 이황이 직접 써준 것으로 류운룡이 이를 귀하게 여겨 ‘겸암’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바깥채의 누마루에 앉으면 절벽 아래로 흐르는 깊은 강이 흐르고 강 건너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겸암의 면모가 그려지는 곳이다.


부용대는 부용을 내려 보는 언덕이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하며, 하회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에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면 물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보여 마을의 모양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한다. ‘하회(河回)’라는 이름처럼 낙동강이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모습도 한 눈에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장관은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9월말-10월초) 중에 펼쳐지는 참나무 숯을 이용한 줄불놀이다. 줄불놀이는 부용대에서 강 건너 만송정까지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일종의 불꽃놀이다.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오면 류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진 옥연정사(玉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8호)를 지나 화천서원(花川書院)으로 내려온다. 화천서원은 유운룡(柳雲龍)이 1601년(선조 34) 향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유림들이 그의 학덕을 기려서 현 위치에 세운 서원으로 겸암의 위패를 모셨고 제자인 김윤안(金允安)과 종손자(從孫子)인 유원지(柳元之)을 배향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1996년 5월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하회탈이 유명하다. 국보 제121호인 하회탈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재료는 오리나무가 많이 쓰였고, 옻칠을 하여 정교한 색을 내어 해학적 조형미가 잘 나타나 미적 가치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 많이 성행했으며, 당시의 지배층인 양반 계층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전통역할극인 별신굿놀이에서 하회탈이 많이 사용됐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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