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병산서원 복례문, ‘극기복례’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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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병산서원 복례문, ‘극기복례’ 가르침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14)
  • 기사등록 2022-10-30 09:30:42
  • 기사수정 2023-12-24 17: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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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경북 예천읍에서 눈을 뜨고 안동시 풍산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 한참을 이동해 도착한 곳은 세 번째 끝 지점이었던 남후면 계곡리에서 서안동대교 건너 북단에 있는 풍산면 계평리다.


풍산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산 모양이 콩밭에 누워 있는 형상이라 굽을 ‘곡(曲)’자와 콩 ‘두(豆)’ 합쳐서 풍성할 ‘풍(豊)’자와 뫼 ‘산(山)’자를 붙여 풍산(豊山)으로 했다고 한다.


서안동대교 교각 위에는 요즘 보기 드문 제비집 한 쌍이 보이는데, 무슨 길조라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기분 좋게 한다. 강 건너 절벽 위에는 낙암정이 오라고 유혹한다.


낙암정(洛巖亭)은 1451년(문종 1)에 여말선초 안동 출신의 문신 배환(裵桓)이 처음 건립했다. 낙암정은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건지산을 뒤로 하고, 낙동강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전망이 확 트인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낙암정 앞에는 넓은 풍산평야가 펼쳐진다. 풍산평야는 풍산읍 안교리와 풍천면 하회마을 일대에 이르는 들을 가리킨다.


천변을 따라 걷다가 안동 강노을펜션 앞에서 숲길을 가로질러 풍산읍 화곡보건진료소 앞까지 간다. 논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라 논으로 낙동강 물을 대는 양수장(揚水場)도 바삐 움직인다. 아침에 길을 나설 때는 좀 쌀쌀한 기분이었는데, 해가 머리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올라간다. 소하천(중수천)을 건너 레미콘 공장 옆을 지나다가 길이 막혀 버스로 마애선사유적지로 이동한다.


마애선사유적지는 2007년 ‘마애리솔숲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조사를 통해 후기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집 자리와 유물이 발견됐다. 이 유적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안동지역에서는 처음 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마애선사유적전시관에서는 발굴 당시의 집 자리를 실제 모습으로 꾸민 발굴지와 이곳에서 출토된 주먹도끼, 찍개 등의 구석기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는데 전시관은 둘러보지 못했다.


                            ▲낙동강 금계국 군락지.


마애솔숲공원을 지나 낙동강 변에는 북아메리카 원산인 금계국이 노랗게 수(繡)놓는다. 비옥한 곳보다는 약간 천박한 곳에서 잘 자란다는 금계국(金鷄菊)은 길가에 많이 심는 꽃으로 길모퉁이나 작은 언덕에 많이 심는데, 이곳은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해가 잘 들고 물 빠짐이 좋은 곳이라 군락을 이룬 것 같다.


꽃밭에 노랗게 취해 거닐다 풍산읍과 남후면을 잇는 풍남교를 지나 풍산천(豊山川)을 건너 유교문화길을 따라 병산서원 입구로 접어든다.


유교문화길은 낙동강 비경을 조망하며 한국 전통문화 탐방도 가능한 길로 유교문화길 1코스(풍산들길)는 낙암정에서 풍산읍에 있는 풍산한지까지 풍산평야를 섭렵하는 14.5㎞ 구간이고, 2코스(하회마을길)는 풍산한지에서 현회삼거리까지 화산(花山, 460m)을 중심으로 병산서원과 화회마을로 이어지는 13.7㎞이며, 3코스(구담습지길)는 현회삼거리에서 부용대를 경유해 구담교까지 연결되는 14.5㎞ 구간으로 총 42.7㎞가 개설돼 있다.


풍천배수장에서 시작해 비포장도로로 약2㎞ 연결되는 병산서원 입구는 유홍준(兪弘濬, 1949년 1월 18일∼)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병산서원과 함께 아름다운 길로 묘사됐으며, 풍산 류씨 문중에서도 비포장을 희망하고 있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어락정(魚樂亭)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오솔길은 낙동강과 자연이 함께 어울리는 선비의 여유로움이 우러난다. 토종 엉겅퀴도 외래종이 판을 치는 세상에 선비정신을 가다듬으며 외롭게 터를 지킨다.


화산 자락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고, 7년의 전란을 눈물과 회한으로 징비록(懲毖錄)을 쓴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柳袗, 1582∼1635)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서애 문집을 비롯한 각종 문헌 3천 여 점이 보관돼 있으며, 해마다 봄, 가을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병산서원.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를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해 사묘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향사(享祀)하면서 서원이 됐다. ‘屛山書院(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다.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 한국서원 건물의 으뜸으로 알려진 병산서원 정문은 복례문(復禮門)이다. 솟을대문인 복례문의 이름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것으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갈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로 강당인 입교당이 보인다. 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돼 있으니,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마음과 몸을 다시 한번 겸손하게 하라’는 의미 같다.


                               ▲병산서원 복례문.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입교(立敎)는 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으로 입교당은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가운데는 마루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며,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병산서원의 백미는 복례문과 입교당 사이에 있는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만대루 같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晩對樓)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에서 따왔다고 하며, “푸르른 절벽은 오후 ‘늦게까지 오래도록’ 대할 만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출입이 금지된 이곳을 관리하시는 후손의 특별한 배려로 만대루에 올라 병산(屛山)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도 하고 싶지만 갈 길이 바빠 잠깐 앉았다가 일어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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