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뿔 셋 소와 청량사 ‘삼각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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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뿔 셋 소와 청량사 ‘삼각우송’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9)
  • 기사등록 2022-10-15 10:27:12
  • 기사수정 2023-12-23 21: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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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들어가는 입구가 공사 중이라 지난번에 지나쳤던 청량산(淸凉山, 870m)을 향해 조반 숟가락을 놓자마자 출발한다. 버스로 입석대까지 이동해 신록이 짙어지는 아침공기를 폐 속 깊이 들어 마신다. 초입에는 조선 숙종 때 문신 권성구(權聖矩, 1642∼1709)가 청량산을 노래한 시구가 반긴다.


금강산 좋다는 말 듣기는 해도(聞說金剛勝 문설금강승)

여태껏 살면서도 가지 못했네(此生遊未嘗 차생유미상)

청량산은 금강산에 버금가니(淸凉卽其亞 청량즉기아)

자그마한 금강이라 이를 만하지(呼作小金剛 호작소금강)


육육봉 올려보며 숨 가빠할 틈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기운이 솟아난다. 더 가파른 계단을 타고 무위당(無爲堂)을 지나 응진전(應眞殿)에 당도한다.


                                    ▲청량산 응진전.


응진(應眞)은 ‘불교의 수행자 가운데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아라한(阿羅漢)’을 말하는데, 이곳 응진전은 금탑봉(金塔峰)의 중간 절벽 동풍석(動風石) 아래에 위치한 청량사(淸凉寺)의 부속 건물 중 하나로 보인다. 안에는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과 16나한(羅漢)이 봉안돼 있다. 특히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상(像)이 안치돼 있다.


응진전에서 김생굴로 가는 중간에는 총명수(聰明水)라는 약수(藥水)가 있는데, 이는 신라 후기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물을 마시고 더 총명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천길 절벽이 좌우로 우뚝 선 곳에서 물이 일정하게 솟아나는데 가뭄이나 장마에 상관없이 솟아나는 양이 일정하다고 한다. 청량산에는 총명수를 비롯해 치원암(致遠庵), 풍혈대(風穴臺) 등 최치원과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있다.


김생과 청량 봉녀(縫女)가 글씨와 길쌈 기술을 겨뤘다는 전설이 서린 김생굴은 경일봉(801m)과 금탑봉(646m) 중간에 있다. 굴속은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다. 신라 명필 김생(金生, 711∼791)이 10년간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전해진다. 김생의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이며 한평생 서예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불렸으며, 송(宋)나라에서도 왕희지(王羲之)를 뛰어넘는 명필로 이름이 났다고 한다.


                                        ▲김생굴.


다시 김생굴에서 급한 경사에 몸을 굴리듯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거닐었던 오솔길을 따라가며 오산당(吾山堂)이라 불리는 청량정사(淸凉精舍)에 들어선다.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44호(1991년 5월 14일)로 지정된 청량정사는 조선 중기에 안동부사를 지낸 퇴계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가 청량산에서 조카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이황 등을 가르치던 곳이다. ‘오산(吾山)’은 ‘우리 집 산’이라는 뜻이면서 ‘유가(儒家)의 산’이란 뜻도 내포돼 있다.


청량산도립공원 내 연화봉 기슭 열두 암봉 한가운데 자리 잡은 청량사(淸凉寺)는 663년(신라 문무왕 3)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33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청량사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절은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 47)과 응진전만 남은 채 피폐해졌다. 법당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고, 공민왕이 친필로 썼다는 유리보전(琉璃寶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특이하게도 청량사의 약사여래불은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이라고 하며, 금칠이 칠해져 있다.


                                ▲청량사 삼각우송.


본전 앞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원효(元曉, 617∼686)가 청량사 창건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아랫마을에서 논갈이하던 뿔이 셋 달린 소를 시주받아 절에 돌아왔다.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날뛰던 소가 신기하게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어 절을 짓는 목재와 여러 물건을 밤 낯없이 운반하고는 완공을 하루 앞두고 죽었다. 이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이었다. 원효는 이 소를 지금의 소나무 자리에 묻었고, 그 곳에서 가지가 셋 달린 소나무가 자라 후세 사람들이 이를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고 부른다.


오전 내내 청량산을 두루 살펴보고 오후에는 고산정이 건너 보이는 가송협(佳松峽)에서부터 낙동강 걷기를 시작한다. 벌써 마음은 여울을 이루며 졸졸졸 흐르는 강물 위에 쪽배를 띠우고 열심히 노를 젓는다. 농암종택으로 가는 길목에는 월명담(月明潭)이 낙동강 절벽에 부딪혀서 소(沼)를 이룬다. 예부터 전해오기를 이곳 깊은 못에 용이 있기 때문에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는데 영험(靈驗)이 있었다고 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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