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강화 연미정, 한강 물길 끝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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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강화 연미정, 한강 물길 끝 조망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80)
  • 기사등록 2022-09-11 08:43:51
  • 기사수정 2023-12-24 17: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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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바람불면 입김이 닿을듯한 북녘을 뒤로하며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로 향하는 도중에 한재당이 나온다.


경기도기념물(제47호)로 지정된 한재당(寒齋堂)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모함을 받아 28세의 나이에 죽은 이목(李穆)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 사당인 정간사(貞簡祠)를 일렬로 배치한 구조다. 1848년에 건립된 구(舊)사당은 담장만 남아있고, 이목의 후손들이 1974년에 건립한 신(新)사당에는 위패와 숙종과 경종이 이조판서로 추증한 교지가 보관돼 있다.


이곳에서는 김포시 주관으로 ‘헌다례(獻茶禮)’가 매년 6월 첫째 주 토요일에 거행한다고 한다. 헌다례는 우리의 차와 멋을 음미하고 한재 이목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차를 올리는 의식이다. 전국 차인(茶人)들이 의식에 올릴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드는 제다실습(製茶實習)을 하고, 첫 물차로 예를 올린다. 한재 이목(1471~1498)은 하성면 가금리에서 태어났으며,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을 받아 19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술 대신 차를 좋아했으며, 차의 경전이 되는 <다부(茶賦)>를 지었다고 한다.


월곶면(月串面)은 김포반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북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조강 넘어 개풍군과 접한다. 동쪽은 하성면·통진읍, 남쪽은 대곶면·양촌읍과 접하며, 서쪽은 염하(鹽河)를 건너 강화읍과 마주 본다. 김포반도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文殊山, 376m)이 면의 서쪽에 위치해 서고동저(西高東低)다. 서울∼강화 간 4차선 국도가 면의 동서를 관통하고 있으며, 국도가 지나는 군하리(郡下里)가 교통의 요지다.


월곶면 개곡1리 마을회관을 지나 개곡교에서 개화천을 따라 조강리 들녘으로 들어간다. 논에는 기러기를 비롯한 철새 떼들이 노닐다가 가끔은 하늘로 날아 군무(群舞)를 춘다. 개화천은 김포시 통진읍 귀전리에서 발원해 4㎞ 남짓 흐르는 작은 하천이지만 한강의 그 많은 지류(천) 중에 마지막으로 유입되는 소하천이다. 한강 변으로 제방을 쌓기 전에는 한강의 본류로 조강포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변에는 농경지가 잘 발달했다.


애기봉 아래 조강포(祖江浦)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큰 포구였다. 강 건너 개풍군 조강포와 상호 배로 왕래하며 번성했던 곳이다. 조강을 기점으로 위로는 임진강과 한강이 있고 아래로는 북한 예성강과 염하와 연결됐으며,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이 조강에서 만나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강을 김포에서는 ‘할아버지 강’이라고도 하며, 기록에는 삼기하(三岐河)로 나와 있다. 조강포구는 세곡선과 화물·여객선이 정박했던 터미널이다.


강을 건너기 위한 사람들과 장사꾼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으며, 세곡(稅穀)을 실은 조곡선(租穀船)이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가기 위해 물때를 기다리며 벌였던 축제가 <조강 치군패>다. 삼국시대부터 1953년까지 이어졌던 조강 치군패의 특징은 농업에서 태동한 농악과는 다르다. 어업과 포구시장, 용왕제와 연관된 물의 문화요 포구문화다. 치군패는 조강포구의 풍성한 경제상황과 맞물려 성행했던 유일한 포구문화의 민속예술이다.


                                ▲문수산성.



외롭게 서 있는 조강포 표지석을 뒤로하고 문수산성으로 이동한다. 사적 제139호로 지정된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 보고 있는 문수산(文殊山)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 산줄기를 따라 해안지대로 이어지는 산성이다. 1694년(숙종 20)에 구축한 것으로, 강화 갑곶진(甲串鎭)과 마주 보는 김포 쪽에 위치해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도 입구를 지키는 성이다. 이후 1812년(순조 12)에 대대적으로 중수했고,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軍)과의 격전으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됐다.


문수산(376m)은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뻗어 나와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七長山)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뻗어 김포시의 문수산(文殊山)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의 끝점이다. 이 정맥을 이루는 주요 산은 <산경표>에 구봉산(九峰山)·석륜산(石倫山)·석성산(石城山)·광교산(光敎山)·오봉산(五峰山)·수리산(修理山)·오자산(五子山)·소래산(蘇來山)·주안산(朱安山)·원적산(元積山)·경명산(鏡明山)·북성산(北城山)·가현산(歌絃山)·약산(藥山)·문수산 등으로 기록됐다.


                                     ▲연미정.


월곶면 보구곶리(甫口串里)는 김포시 서북단(西北端)의 자연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염하강을 건너 강화읍 연미정이 코앞이고, 북으로는 용의 여의주 같은 유도가 있다. 한강 건너에는 북한의 개풍군이 마주한다. 이곳이 바로 한강 물길이 시작해 천삼백 리 길이 끝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河口)다. 마을 길을 따라 강변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서 볼 수도 있지만,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강화도 강화읍 연미정으로 강화대교를 건너 자리를 옮긴다.


                              ▲한강하구의 유도.


강화읍 용정리를 지나 월곶리에 있는 연미정에 올라서니 한강하구의 유도가 선명하다. 유도(留島)는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 위치한 섬으로 거의 바다와 가까워지는 기수역(汽水域)에 있다. 민통선 안쪽에 포함됐기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돼 환경이 잘 보존돼 있다. 저어새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유도는 까마득한 옛날 홍수에 떠내려오다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과 함께 ‘머물은섬>머루무섬’이 됐다고 전해온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가 두 채 있었고, 농사도 지었다.


인천유형문화재(제24호)로 지정된 연미정(燕尾亭)의 최초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뒤 조선시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野人)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은 황형(黃衡, 1459~1520)에게 조정에서 세워 하사했다고 하며, 지금은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옛날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는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썰물 때는 물이 빠져나가는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살이 빠르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염하강으로 흐르는데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 같다고 해서 연미정이라 이름 붙었다. 연미정의 달맞이는 강화 8경의 하나다.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는 80회가 마지막입니다. 다음주 부터는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가 연재됩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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