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백로 노닐던 나루터 ‘노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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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백로 노닐던 나루터 ‘노량진’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70)
  • 기사등록 2022-08-07 09:10:14
  • 기사수정 2023-12-23 16: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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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동작동 고개 넘으면 흑석동이다. 흑석동은 243번지 일대에서 검은색 돌이 나왔다고 해서 지명을 ‘검은돌’이라고 했고, 이것을 한자로 바꿔 흑석(黑石)이 됐다.


1933년 중앙대학교가 흑석동에 자리를 잡은 뒤 중앙대학교와 함께 발전해 왔다. 관내 주거시설과 상업시설 상당수는 중앙대 학생들이 이용한다. 2005년 뉴타운 조성으로 기존 주택이 철거되면서 자취생들이 중앙대 주변에 살 곳을 구하지 못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한강 경치에 반해 마을 이름을 ‘명수대(明水臺)’로 부르기도 했다.


한강의 남안(南岸)을 따라 동·서로 길게 늘어선 다리가 노량대교(鷺梁大橋)다.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대회’를 앞두고 동작구 동작동(銅雀洞)과 노량진동(鷺粱津洞) 사이의 올림픽대로 확장이 어렵게 되자 한강 변을 따라 놓은 다리다. 길이 2070m며, 1986년에 준공됐다. 이 다리의 건설로 김포공항~잠실종합경기장 간의 주행시간을 단축했고,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많은 교통량을 흡수하게 됐다. 이 교각 밑으로는 자전거도로와 보행로가 나 있어서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노량대교 노량진 쪽 끝 지점에는 <漢江水死者弔魂碑(한강수사자조혼비)>라고 새긴 돌기둥이 숨어있다. 뒷면에는 <昭和四年六月建龍山記者團有志(소화4년6월건용산기자단유지)>라고 쓰여 있어 1929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철교(1900)와 한강인도교(1917)가 준공되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희생된 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당시 용산경찰서와 철도국에 출입하던 기자들이 세운 것 같다. 용산기자구락부에서는 1922경부터 한강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노량진(鷺梁津)은 ‘백로(白鷺)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던 나루터로서, 한강대교 남단에 있었다. 시흥·수원을 거쳐 충청도·전라도로 통하는 곳이었다.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뒤로 경제와 군사 등의 측면에서 한층 중요시됐다. 태종 때에 광진도와 함께 처음으로 별감이 배치되고, 이후 경강의 4대 도선장의 하나로 교통량이 많았다. 경향 각지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집결 장소였으나, 지금은 한강철교와 한강대교가 건설됨으로써 그 기능을 상실했다.


                                ▲주교사터 표지석.


노량진본동사무소 앞 도로변에는 <주교사터(舟橋司址)> 표지석이 있다.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정기적으로 참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 놓은 일을 전담하는 주교사를 1789년(정조13)에 설치했다. 주교사에서는 서울의 선박 수백 척과 사공 1천 명을 동원해 배다리를 설치했으며, 정부에서는 배다리 가설비를 마련하기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곡 운반권을 주교사에 부여했다. 배를 이용해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원성도 커져 정조의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능행길화성행차도.


‘주교사터’ 앞에는 정조(正祖)가 배다리를 건너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 융릉)에 갈 때 잠시 쉬고 갔다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 있다. 건축연대는 정조13년(1789년) 이후로 보고 있으며, 능행 도중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한다. 내부 벽에는 정조의 능행길화성행차도 <반차도>가 그려져 있다. 정선(鄭敾)의 동작진(銅雀津)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걸려 있다.





                                         ▲사육신묘.


가까운 곳에는 사육신묘역이 있다. 일찍부터 박씨지묘(朴氏之墓)·유씨지묘(兪氏之墓)·이씨지묘(李氏之墓)·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서 있는 네 개의 무덤과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다. 민간에서는 네 개의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의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 전해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생육신의 한 분이신 매월당 김시습이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시신을 바랑에 담아다가 노량진 외진 언덕에 임시로 매장했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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