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남양주 마재마을 다산 정약용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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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이른 아침부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 있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생가로 바삐 길을 나선다.


‘능내(陵內)’란 지명은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수양대군(세조)을 도와 정난공신1등에 오르고 우의정과 명나라의 벼슬인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을 하사받은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 1403∼1456년)의 묘가 있어서 ‘능안’ 또는 ‘능내’라 했다고 한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한확의 따님이고, 명(明)나라 성조(成祖)의 여비(麗妃)가 한확의 누이다.



▲‘□’자형 다산생가.


너무 일찍 와서 그런지 다산 생가 대문은 잠겨 있다. 들어가는 길옆에는 수원화성을 건축할 때 사용했던 거중기(擧重機)가 실물모형으로 자리한다. 옆의 실학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생가 마당으로 들어선다. 주택구조는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자형 한옥이다. 생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한 것으로 집 앞에는 강이 흐르고, 집 뒤로는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여유당.


이 집의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다. 다산이 1800년(정조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여유(與猶)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뜻이라고 한다.


즉 “겨울 냇물은 무척 차갑고 뼛속까지 추위를 느낄 것이니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냇물을 건너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세상이 두려운 사람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고,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항상 따르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다산은 전남 강진 유배지에서 얻은 호이고, 여유당은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지은 호다.


집 뒤 언덕에는 다산부부의 합장묘가 있어 올라가 본다. 다산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학자다. 조선의 개국이념인 주자학을 신봉하던 당시에 조금이라도 사상적 이념에 어긋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서슬 퍼런 시기에 그는 오히려 유배지에서 뜻을 드높이고 학문을 완성해 오늘의 시대에도 새겨들을 내용으로 광활한 학문의 세계를 이뤘다.



▲다산 정약용선생 상.


다산은 유배 기간 중 자신의 학문을 연마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했고, 이 저술을 통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다산은 비록 남인의 가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이 당쟁의 중심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자랑했고, 그 아들들에게도 “당쟁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는 문벌과 당색을 타파하고, 고른 인재 등용을 주장했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다산의 유물과 생각들을 휙 돌아보고 나오는 것이 크게 아쉬웠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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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7-10 09: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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