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세종대왕 영릉(英陵)·효종대왕 영릉(寧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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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세종대왕 영릉(英陵)·효종대왕 영릉(寧陵)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53)
  • 기사등록 2022-06-11 03:32:38
  • 기사수정 2023-12-23 21: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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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파사성을 내려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는 한 울타리 안에 두 분의 임금을 모신 왕릉으로 이동한다. 이름이 묘하게도 모두 ‘영릉’인데, 한 분은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英陵)이고, 또 한 분은 효종대왕을 모신 영릉(寧陵)이다. 이 능역(陵域)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됐고,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매표소를 지나 먼저 寧陵으로 올라간다. 寧陵(영릉)은 효종(孝宗 1619 ∼1659, 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1618∼1674)의 무덤이다. 왕릉과 왕비 능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라고 한다. 처음엔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고 하여 1673년(현종 14)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효종대왕 寧陵.


왕릉 바깥쪽으로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다.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능에 갖춰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고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다.


홍살문[홍전문(紅箭門)]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문이며,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정자각(丁字閣)은 왕릉(王陵) 등의 바로 앞에 짓는 ‘丁’자형 침전(寢殿)으로 제례(祭禮) 때는 이곳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石函)은 제사가 끝난 뒤 철상(撤床)하면서 축문을 태워 묻는 곳인데 이를 ‘예감(瘞坎)’이라고 한다. 정자각 우측 뒤로는 영릉비(寧陵碑)가 있는데, 이는 효종대왕 릉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것이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흐르는 금천(禁川)을 건너 밖으로 나와 ‘왕의 숲길’을 따라 세종대왕이 계신 英陵(영릉) 쪽으로 가야 하는데, 왕의 숲길은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을 연결하는 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해 영릉(寧陵)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英陵)을 참배했다”는 기록에 따라 조성한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며, 왕의 발자취를 느껴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英陵(영릉)의 보수공사로 출입을 막아 발길을 돌려 효종의 寧陵(영릉) 재실을 둘러본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재실은 재방, 안향청, 제기고,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조선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 되어 원형이 훼손됐다. 그러나 이곳 영릉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잘 되어 있다.


경내의 재향과 관계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 등의 고목도 함께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 시대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 보물(제1532호)로 지정됐다. 특히 회양목은 원래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곳의 회양목은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년 이상 크게 자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나무로 유래와 역사가 깊어 천연기념물(제459호, 2005년 4월)로 지정됐다.


英陵(영릉)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이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랐다고 한다. 국조오례의는 조선 초기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 오례(五禮)에 관한 의식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세종대왕 영정.


원래 英陵(영릉)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 태종의 능) 경내에 왕과 왕비를 합장해 쌍실을 갖추고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아 1469년(예종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됐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魂遊石) 2좌를 마련해 합장 능임을 표시했다. 난간 석에 12지신 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해 방위를 표시했다고 한다. 혼유석은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은 직사각형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돌이다.


                                   ▲세종대왕 英陵.


영릉 밖에 있는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는 훈민정음의 초성 ‘ㅎㅁㅈㅇ’자를 입구에 형상화 해 놓았다. 내부에는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세종실록)”는 기본으로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기구를 발명해 혼천의(渾天儀) 등 천문관측기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었다. 우리 실정에 맞는 농사직설(農事直設)을 제작해 널리 배포했고, 아악(雅樂)을 정리했다. 이러한 업적의 바탕에는 세종의 애민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남한강의 여강길을 마무리하면서 옛 선조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했던 여주팔경(驪州八景)을 회상해본다.


제1경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정겨웁고<神勒暮鍾(신륵모종)> 제2경 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가 밝히는 등불<馬巖漁燈(마암어등)>은 제3경 강 건너 학동마을 밥 짓는 연기<鶴洞暮煙(학동모연)>와 어우러지고, 제4경 제비여울 돛단배 귀항하는 모습<燕灘歸帆(연탄귀범)>과 제5경 양섬에 기러기 떼 내리는 모습<洋島落雁(양도낙안)>이 제6경 오학리 강변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八藪長林(팔수장림)>과 어울려 하나가 될 때 제7경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이 우는소리<二陵杜鵑(이릉두견)>에 제8경 파사성 소나기 스치는 광경<婆娑過雨(파사과우)>이 가경(佳景)이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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