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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궁궐 남쪽에 있는 연못 ‘궁남지’ 2023-04-30 08:23
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19)

【에코저널=서울】곤한 잠을 자고 여명이 오기 전에 덤으로 계룡산 신원사를 둘러본다. 신원사(新元寺)는 계룡산에 있는 절로 651년(백제 의자왕 11년) 열반종의 개조(開祖)인 보덕(普德)이 창건했으며, 1298년(고려 충렬왕)에 무기(無奇)에 의해 중건됐다. 조선 태조 때 무학(無學)이 삼창을 하면서 영원전(靈源殿)을 지었으며, 1876년(고종13년)에 보연(普延)이 다시 중수했다. 경내에는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인 중악단(中嶽壇)이 있다.

▲계룡산신원사 대웅전.

중악단은 신원사 대웅전 우측 뒤편에 자리 잡은 산신각으로 계룡산신을 모시는 제단(祭壇)이다. 산신각 중에는 전국 최대 규모이며, 조선 태조는 1394년(태조3년)에 북쪽 묘향산의 상악단, 남쪽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영산(靈山)으로 꼽히는 3악의 하나인 계룡산의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을 세우고 산신제를 지내오다가 1651년(효종2년)에 단이 폐지됐으며, 1879년(고종16년)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건축하고 이름을 중악단(中嶽壇)으로 고쳤다.

자주 옆으로 지나면서도 처음 들른 신원사를 빠져나와 서둘러 조반을 하고 부여군 규암면 금강 변 백마강레저파크에 도착한다. 백마강레저파크는 백마강교에서부터 부산(浮山) 입구까지 하천부지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데, 강 건너가 부소산이고 숲 사이로 보이는 게 낙화암과 고란사다. 그러나 ‘백마강’이란 이름이 참 거슬린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하는 코스모스 밭을 거닐다가 레저파크 끝에 있는 부산으로 간다. 부산(浮山)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 ‘성난 용의 심술로 억수 같은 비가 석 달 동안 내려 청주에서 홍수로 떠내려 온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규암면 진변리 금강 변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미소를 머금고 합장하는 좌불(座佛)이 반겨준다.

이산에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가 낙향한 후 북벌계획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자 “경의 뜻이 타당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뜻을 이루기엔 너무 늦다(誠以至痛在心有日暮途遠意)”고 답을 내렸다고 한다.

뒤에 우암 송시열이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의 8자를 써서 아들 민서(敏敍)에게 전했으며 1700년(숙종26)에 손자 이이명이 바위에 이 8자를 새겼는데, 이것이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이다. 이 각서석 위로 지은 정자(亭子)의 이름은 대재각(大哉閣)이라고 하는데 이는 <상서(尙書)>의 “대재왕언(大哉王言 :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에서 따왔다고 한다.

부산을 넘어 백강나루로 나온다. 백강나루는 규암면 진변리마을 앞에 있는 나루다. 금강에는 고란사나루에서 유람객을 태운 황포돛배가 가을 물살을 가르고, 주렁주렁 열린 강변의 대추와 감은 자꾸만 호주머니에 숨긴 손을 꺼내게 만든다. 역시 가을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입맛만 다셔도 저절로 배가 부르는 풍요의 계절이다.

백제대교를 건너자마자 이곳 출신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의 시비가 보여 잠깐 들른다. 신동엽은 서사시 <금강>에서 “동학운동이 상징하는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과정을 통해 이 땅의 주인이 한민족 스스로이며 민중 그 자체임을 소중하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궁남지.

신동엽의 시비가 있는 곳에서 궁남지로 이동한다. 궁남지(宮南池)는 말 그대로 ‘궁궐의 남쪽에 있는 못’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라고 해서 일반 정원의 조그만 연못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신라의 안압지는 위풍당당한 남성상이라면, 궁남지는 백제의 차분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포근한 여성상이다.

수양버들이 하늘거리는 주변 길은 산책하기에 좋고, 못 가운데에 조성된 조그만 섬과 정자(抱龍亭)는 신선이 노닐기에 안성맞춤이며,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이들과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백제 서동(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와의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이 깃든 궁남지에는 국화축제가 시작됐는지 국화로 만든 조형물들이 궁남지주변에 수를 놓는다.

다시 백제대교를 건너 규암면 금강변 자온대라는 바위 위쪽에 세워진 수북정(水北亭)으로 간다. 자온대(自溫臺)는 백제시대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할 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명명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위치가 불분명하며, 수북정은 부여팔경의 하나로 조선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이 건립한 것으로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으로 부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날렵한 팔작지붕의 형태다.

오후에는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백제 수도 ‘웅진성’과 ‘사비성’의 외곽 성이었던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간다.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축성연대 등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귀중한 유물로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위사좌평 백가’를 시켜 성을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 지명이 ‘가림군’으로 ‘가림성’으로도 불린다.

▲성흥산성.

백가는 자신을 이곳에 보낸 것이 좌천으로 생각해 불만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이 난을 평정하고 백가의 시신을 금강에 던졌다고 전한다. 이곳은 백제 멸망 후에는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위에 서서보니 산 정상을 중심으로 수평이 되게끔 ‘태뫼식’ 산성으로 ‘군창지와 우물터’ 등 시설을 갖춘 요새 중의 요새 같다. 정상의 늙은 느티나무는 질곡의 역사를 가슴에 품은 채 사람들의 재롱을 받아주며 말없이 서 있다.

성흥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근처의 ‘대조사(大鳥寺)’에 들린다. 대조사는 백제의 고승 겸익이 창건 했다고 전하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 뒤의 고려 때 세웠다는 높이 10m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은진 관촉사의 미륵불처럼 불균형의 극치를 이루며 오뚝한 코에 눈을 부릅뜨고, 옆의 소나무는 용틀임을 하는 자세로 우산처럼 서 있다.

성흥산성에서 장암면 장하리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이동한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정림사지오층석탑을 충실히 모방한 탑이며, 고려 때 건립된 백제계 석탑으로 기단부가 낮고 좁은 것이 특징이다. 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이 있었던 게 사실이나 푯말에는 사찰 이름이 없다.

가야 할 길은 먼데 낮이 짧아져 괜히 발걸음만 속절없이 바빠진다. 부여군 세도면에서 황산대교를 건너면 논산시 강경읍이다. 금강하류에 위치한 강경은 조선조부터 일제강점 초기까지 금강을 따라 발달된 수운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대구 평양과 더불어 3대 시장의 명성과 영화를 누리었던 곳이다. 1931년 호남선 개통과 육상교통의 발달로 그 영화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다가 최근에 젓갈시장을 중심으로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어 그나마 조금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다.

소설 ‘소금, 불의 나라, 은교’ 등의 작가 박범신의 문학비가 있는 황산근린공원 주변에는 ‘김장생 조광조 이이 이황 성혼 송시열’ 등 6인의 현인을 모신 ‘죽림서원(竹林書院)’, 김장생이 금강이 굽어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서 후학들에게 강학을 하던 ‘임이정(臨履亭)’,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이 스승을 가까이 하고 싶어 건립된 ‘팔괘정(八卦亭)’ 등 유물이 있다. 그리고 팔괘정은 이중환이 택리지를 썼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멀리 금강 상류를 바라보니 지금까지 스쳐왔던 흔적들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린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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