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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로망스 2006-01-16 15:33
기타에 관한 한 나는 할말이 많은데, 그중에서 꼭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뭐니뭐니해도 연애시절 아름다운 클래식 기타 선율로 아내를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했다던가 그래서 죽자살자 스토커 마냥 목맸다던가 하는 스토리는 너무 진부한 내용이라 피하기로 하자. 나는 무엇으로 젊은 나이에 한창 콧대높은 아내를 공략할 것인가 고민 고민하다 풍월로 주워들은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는 사실을 최대한 이용했다. 당시 서른이 넘은 노총각이였던 터라 하늘이 도와 보내준 그 기회를 놓치거나 늦장부리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기타연주곡 레파토리 일번은 '작은 로망스'라는 곡이었는데 그곡을 좋아하게 된 동기는 곡을 만든 사람이, 루이제 발커라는 독일 여성으로 소르, 타레가, 세고비아 등 많은 남자 기타리스트 틈에 드물게도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또, 로맨스풍 특유의 서정적이고 조금은 슬픈 선율에 멋진 로맨스를 꿈꾸고 있었던 나 자신이 매료되지 않았나 싶다.


클래식기타를 배울 때부터 익히기 시작한 이 곡을, 아내를 만날 무렵에는 하도 많이 치는 바람에 눈감고도 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따라서 '작은 로망스'라는 곡에 관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기교나 감정표현면에서 자신이 있었고 곡을 음미하면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꿈꾸기도 했다.

아내와 단둘이만 있었던 그때 그 공간에서, 겨울저녁 달빛이 아내의 약간은 도도한 하얀 얼굴을 비추고 있었을 무렵이었던가? 내가 그 곡을 치기 시작했을 때, 아내는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떻게든지 기타 한곡으로 진검승부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내가 기타를 치고 있었을 때, 눈감고도 칠 수 있을 만큼 쉬웠던 곡이, 그날따라 왜 그리도 어렵고 길게 느껴졌던지...

어찌됐든 곡이 한참 클라이막스에 접어들 무렵, 다리를 꼬았던 아내가 다리를 푸는가 싶더니 귀를 쫑긋 세우며 소리나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때 그녀의 몸만 기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작은 로망스, 그곡이 끝났을 때 쯤,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아내의 혼이 내게 기울이는 기우뚱하며 흔들리는 소리를...

결혼 이후에도 나는 아내 앞에서 자주 그 곡을 연주하곤 했는데, 지극히 당연했던 이유중 하나는, 그 곡을 연주하는 순간 연애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고 기타한곡으로 도도하기 짝이 없던, 천하에 제일가는(?) 여자를 품에 안은 개선장군의 추억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던 아내입에서 나는 최근에 충격적인 소리를 듣게 됐다. "여보, 그 곡 지금 몇 년째인줄 알아요? 20년이예요. 당신 지겹지도 않아요? 제발 부탁인데요, 레파토리좀 바꿔보세요"

"아니, 연애시절 그렇게 감격해마지 않던 아내의 입에서, 이제 지겹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오랫동안을 허구한날 들으면서도 한결같이 감격해하며 "여보 당신 기타소리는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예요, 당신만큼 기타를 잘치는 사람을 나는 만나보지 못했어요"라며 콧소리를 섞어가며 나를 추켜세우더니만... "혹시 갈아치울 마음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큰일났다, 여기는 한국도 아니고 캐나다인데. 이제 나는 누구 말처럼 더 이상 오빠라고 불러줄 사람도 없는데..."

아내의 따끔한 그 말은 기타에 관해서는 적어도 아내 앞에서는 내가 이 세상 최고라고 믿고 있었던 터라 적지 않은 충격이었고 배신이었다. 덕분에 나는 꽤 여러 날을 삐진 채 아내앞에서 두 번 다시 기타를 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아무리 부부지만 더 이상 사서 자존심 상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마음먹었다.

연초를 맞아 우리집에는 떡국이 거의 매일 주식으로 식탁에 오른다. 식구들이 워낙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떡만두국도 계속 먹어대니까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몇끼를 주고도 모자라서 또다시 떡국을 끓여주는 아내에게 나는 순간적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아니, 여보 매끼 떡국만 자꾸 주면 어떡해? 밥 좀 없어?"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짜증을 부리는 순간, 나는 속으로 엄청 뜨끔했다. 고작 몇 끼 연이은 떡만두국에 짜증이 났는데, 경우야 다소 다르다 하더라도, 강산이 두번 바뀔 동안 똑 같은 곡을 쳐댔으니 아내도 엄청 지겨웠을 것이 아닌가?

나이를 먹으면 변화를 두려워한다는데,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조차도 못 느낀다는 것은,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원하지 않았는데도 또 새해를 맞았다. 올해는 아내가 어렵사리 지적해준 대로 기타연주곡 레파토리도 새로운 것으로 바꿔보고, 또 내 삶을 좀더 성실하고 진지하게 살아보려고 한다.

진취적인 변화, 노력이 따르는 건전한 변화를 통해서 내 나이를 극복해보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변화를 꾀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또 다른 작은 로맨스를 꿈꾸는 일이다. 꿈은 커녕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엄두도 못 낸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적어도 아내 눈이 새파랗게 불을 켜고 있는 한 말이다.

<캐나다 캘거리=이병구> byungkoo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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