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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거울> 2005-08-19 15:58

대놓고 얘기하기엔 좀 쑥스럽지만, 대가 센 여자와 사는 남자는 부부 싸움 후에 정말이지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여자들이야 보따리 싸 가지고 친정에 가서 두문불출하고 기 싸움이라도 벌일 수 있지만 남자가 짐 꾸려서 시댁으로 간다는 것은 남 보기 볼쌍 사나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민오기 몇 년 전 아내와 한바탕 한 후 집을 나온 나는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친구들한테 "아내와 싸운 후에 집 나왔다"고 하소연 해봤자 따돌림 받을 것이 뻔한 이치고, 형님댁이나 누님댁을 가자니 우리집으로 우루루 몰려가 아내의 머리채를 뒤흔드는 후환이 두렵기도 했다. 궁리 끝에 나는 야밤인데도 불구, 평소 친분을 나누던 한길로 스님이 머무시는(몇년 전 입적하셨음)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봉인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좁고 구불구불한 어두운 산길을 따라 겨우겨우 산사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꽤나 깊어져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고, 어렴풋이 파르스레한 하늘빛과 산마루에 걸린 달빛에 간신히 몸체를 드러낸 대웅전 처마끝에 매달린 풍경소리만이 '뎅그렁 뎅그렁' 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대웅전을 가로질러 한켠에 자리한 스님의 방을 바라보니 미닫이 방 희뿌연 문풍지로 서도 에 정진하고 계시는 스님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스님 제가 왔습니다" "아니 자네가 이 밤중에 웬일인가?"

부드럽고 다정하신 말씀과는 달리 눈길 한번 변변히 주시지 않고 여전히 붓글씨를 쓰고 계신 스님께 오직 억울한 심정에만 사로잡혀있던 나는 스님께서는 묻지 않으셔도 열심히 나의 정당함과 아내의 부당함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나의 잘못은 아주 깊숙한 곳에 꼭꼭 감춰놓은 채 "스님 여자가 남자한테 어찌 그렇게 심하게 굴 수가 있습니까? 기본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격도 너무나 못됐구요. 이렇게 못된 여자와 평생을 아웅다웅하면서 사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훨씬 편하겠습니다."

나의 애끓는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내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등 눈길 한번 안 주시고 글씨만 한 획 한 획 써내려 가시는 스님을 보면서 나는 그때 서운함을 뛰어넘어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스님 어떻게 저한테 이렇게 모욕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오밤중에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찾아온 저한테 말입니다. 젊은 시절 바른 인생 길을 한번 열어보겠다고 스님 밑에서 불법을 배우며, 오랜 기간을 금식하며 정진하던 저를 어떻게 이렇게 홀대하실 수가 있습니까? " "저는 지금 선문답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자 온 것은 더욱 아닙니다, 저는 단지 저의 집 부부싸움 얘기를 하러 왔습니다, 서로가 잘났다고 하는데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 알고 싶습니다. 스님의 그 지혜로우신 판단으로 어서 한 말씀 해주세요 예전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 스님께 항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망과 서운함을 안고 일어서려는 나를 향해 돌아앉으신 스님께서는 갑자기 말씀을 시작하셨다.

"병구! 아내는 거울과 같은 것일세, 자네 표정을 이방에 들어올 때 얼핏 살펴보니 많이 화가 나 있더군 그 표정으로 아내와 마주하다 왔나?" "보나마나 자네 아내의 표정도 말이 아니겠군, 자네 얼굴은 화를 내고 있으면서 거울보고 '왜 웃지 않고 화내고 있느냐?' '왜 찌푸리고 있느냐'하고 화를 내고 있으면 거울이 어찌 웃을 수가 있겠나? 어서 내려가게나 내려가서 자네 부인 표정이 밝지 않고 수심에 차있거든 자네의 얼굴이 그렇다고 생각하고 얼른 웃어보게나 그러면 자네 부인의 표정도 금방 웃는 얼굴로 바뀔 것일세" "자네 아내의 얼굴은 자네의 거울 인 것이야"라고 말씀하셨다.

고국을 떠나온 지 어언 십여 년 수없이 많았던 아내와의 갈등 속에서도 부부란 이름을 깨뜨릴 수 없었던 것은 이따금씩 찾아와 내 귓전을 맴도는 그때 그 스님의 말씀 "아내는 자네의 거울과 마찬가지야" 때문이 아닐까 한다.

거울-------이상(李箱)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 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握手) 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 못하는 구료마는
거울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 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 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反對)요마는
또 꽤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診察) 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캘거리=이병구> byungkoo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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