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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에서의 추억 2005-04-27 00:35
비 내리는 이른 아침, 메밀꽃 축제가 열리는 봉평으로 향하는 길은 가을을 재촉하는 비로 인해 한껏 가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산허리를 휘감던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그 사이사이로 산은 보이고 사라지고를 반복합니다. 꼭 그리움처럼.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함을 즐깁니다. 언제나 그렇듯 목적지로 향하는 시간은 즐겁습니다. 만나게 될 풍경과 사람과 모든 행위들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 그것들은 항상 나를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설사 실망할 일이 되더라도.

너른 산자락 끝의 고랭지 배추밭과 무우밭 그리고 감자밭. 또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산 허리춤서부터 자리 잡은 다소곳한 하얀 색의 너른 밭에 빈틈없이 핀 소박한 메밀꽃이 보입니다. 메밀꽃은 봉평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차량 행렬이 많아지고 길가에 크고 작은 안내판이 우리를 마중합니다. 물론 비는 여전히 내리구요. 비도 그 메밀꽃 구경을 같이 하자 하니 어쩔 수 없이 동행해야겠네요. 흐뭇한 달빛아래 피어있는 메밀꽃을 보며 걷잡을 수 없는 관능을 느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빗물이 맺혀있는 그 작디작은 꽃잎의 모습은 또 어떻구요. 그 또한 아름다움을 넘어 슬픔까지 느끼게 해 주고 있으니 어떤 것이든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은 정말 숨 가쁜 행복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윽고 다다른 평창 무이 예술관.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찾아 온 이곳은 여전히 아담하고 아름답습니다. 운동장 가득 메운 조각 작품들. 그 옆으로 이어진 메밀꽃 무리들. 작업실위에 마련된 작은 카페에서 나는 솔잎향기와 반가운 얼굴과의 만남.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 하면서도 그대로 동화되는 유행가 한 가락과 들고 나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들. 너른 창을 통해 바라본 울창한 전나무들의 늠름한 기운. 비로 인해 뿌옇게 보이는 먼 곳의 그것들은 여전히 그리움 같습니다.

잠시 후 작품의 주인들과 반가운 인사가 오갔습니다. 우중에 먼 곳에서 찾아 온 우리 일행에게 감사하고 우리는 또 이런 문화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누며 아주 오랜 지기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반가워했습니다. 아름다운 만남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솔잎차 한잔으로 비에 젖은 몸을 녹이니 몸이 한결 훈훈해졌습니다.

그분들의 안내로 전시되어있는 서예, 그림, 도자기, 조각 작품들을 감상하고 난 후에 각각의 작가실과 부속된 살림살이들을 돌아보니 평소에 몰랐던 작가들 세계로 한 발짝 다가선 듯 했습니다.

독특한 문체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서예작품들을 감동하고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두 달만 연습하면 누구나 한다며 손사래치며 겸손해 하는 소하 이천섭선생님.

메밀꽃만 그려서 유명해진 메밀꽃 작가 정연서 화백은 길게 땋은 머리에서부터 독특한 인상을 주는데 이효석님의 ‘메밀꽃 필 무렵’을 각 문단으로 나눠 그려서 전시해 놓았습니다.

질박한 모양새와 소박한 빛깔로 음식의 맛을 한층 돋궈낼 수 있는 생활 도자기들.

무리지어 어디론가 향하는 군상들과 누드 여인의 모습. 작가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 또 어떤 것은 거침없는 기개가 느껴지는 조각상들을 표현해 놓았는데 모든 분야에 짧은 안목을 갖은 나로서도 뭔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어 조금 떨어진 폐교에 자리 잡은 유인촌님의 ‘달빛 씨어터’개관식에 갔습니다. 인지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연극을 한다하니 그 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 척박한 문화공간에 ‘연극’이라는 장을 펼치게 됨을 축하해주고 있었습니다. 지적이고 점잖은 인상의 유인촌님은 서글서글하니 사람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동안의 어려움과 드디어 이뤄냈음을 단숨에 토해내는 그의 말에는 성취한 사람만이 갖는 열정과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연극인 박정자님도 만났는데 그 친절한 모습은 여전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이 자그마한 학교에서 공부하고 뛰어 놀던 어린시절의 사람들을 이제 어른이 되고 또 노인이 된 바로 그 사람들을 문화의 장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성숙된 모습들을 보면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자칫 허물어져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을 두 학교를 이렇게 문화예술을 꽃 피울 수 있게 해준 그 모든 인연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 곳을 떠나서도 나는 늘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볼 것입니다. 비는 여전히 내립니다.

이제 사위는 어두워지고 무이 예술관에는 하나 둘 불빛이 켜집니다. 나는 가만히 귀 기울여 봅니다. 어린이들의 글 읽는 소리와 노랫소리 웃음소리.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경쾌한 발자국 소리. 또 다른 소리 소리들. 참 먼 옛 이야기 같지요.

지금은 메밀꽃잎과 조각상 사이로 오카리나 연주가 아름답게 퍼집니다. 그 옛날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처음 들어 보는 오카리나 소리.

먼 바다에서 들릴 듯한 신비하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오카리나의 고운 선율은 지금도 이 마을 어디쯤엔가 머물고 있을 법한 성서방네 처녀와 허생원의 귀에도 들리겠지요.

이곳에 모인 예쁜 연인들이 팔짱을 꼭 끼고 있는 모습이 그 옛날 연인들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사랑, 그것은 여전히 가슴 설레게 하는 영원한 화두이지요.

연주회도 끝나고 이곳 주인들의 지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옛날 주막거리처럼 만들어놓은 뒷채에 글쟁이만 빼고 그 밖의 모든 쟁이들이 모여 조껍데기 술과 메밀전, 김치 안주로 술잔과 덕담이 오고 가고 때로는 농익은 농담에 좌중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립니다. 장고소리, 북소리, 꽹가리소리, 그 사이로 노랫소리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쟁이들의 그 숨길 수 없는 끼들이 거침없이 발산됩니다. 그에 질 새라 빗소리까지 가세합니다.

안주가 다 없어지면 주인 나그네 할 것 없이 아무나 나서서 즉석 안주를 만들어 내오고 그러면 또 술잔은 돌고. 생긴 모습이 가수 누구 같다면 즉시 그 가수의 노래가 나오고. 끊임없이 나오는 소하 선생의 타령은 한 바탕 마당극을 연출합니다.

소나무장작 타는 냄새, 그 알싸하고 친근한 냄새사이로 감자 익어 가는 냄새. 그리고 옆 사람에게서 나는 진솔한 냄새. 내가 너무 흥분했나요. 아닙니다. 정말 내가 그 자리에 함께 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이었습니다.

오늘밤 들었던 소리와 냄새를 한 동안 그리워 할 겁니다. 순간은 오직 그때만 존재하기에 다시 이런 자리가 마련되더라도 오늘의 이 만남을 소중히 생각할 것이고 내내 그리워 할 겁니다.

흐믓한 달빛에 메밀꽃을 보면서 감출 수 없는 관능을 느끼러 다시 이곳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정다운 얼굴들을 떠 올리겠지요.


이천사년 여름과 가을사이에 <글/길명수>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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