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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앵두 줍는 할머니 2005-04-22 17:45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군요!

호영이는 지난 2월 경기도 성남 남한산성 중턱에 전셋집을 얻었다. 서울의 전세값이 비싸기도 했지만 호영이는 자연에 둘러싸인 맑은 공기 속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성남으로 집을 구한 것이었다.

호영이가 사는 집에서 30미터 떨어진 곳에 노루목 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또 공원 주변이 비교적 산세가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다람쥐, 딱따구리 등 온갖 산짐승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야, 동물원, 식물원이 따로 없네.”

호영이는 집 근처에 펼쳐진 자연경관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영이는 아침마다 노루목 공원에서 운동을 했다. 공원 한가운데 팔각정 앞에는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호영이는 앵두나무에 잎사귀가 나오지도 않은 2월부터 은근히 통통한 앵두열매를 기다렸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났다. 앵두나무는 호영이의 바람처럼 어느덧 잎사귀가 돋아나고 4월에는 제법 무성해졌으며 5월 초순에는 꽃도 활짝 피었다. 마디가 굵고 잎사귀 사이가 촘촘한 걸로 보아 아주 많은 앵두가 열릴 것이라고 호영이는 생각했다.

농촌에서 자란 호영이는 가지를 보고 숱한 앵두가 달릴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잘 알고 있었다. 5월 중순 앵두꽃이 지면서 열매가 맺기 시작했다. 마치 손으로 뿌려놓은 듯 나뭇가지에는 앵두가 더덕더덕 달려 있었다.

“와, 정말 굉장한데… 열 되는 딸 수 있겠는 걸.”

호영이는 벌써부터 새콤달콤한 앵두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한 열흘쯤 지나자 앵두가 연분홍빛을 내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만 있으면 물이 통통 오른 앵두를 따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영이는 연분홍빛의 앵두가 부쩍 줄어든 것을 알게 되었다. 채 익지도 않은 열매를 누군가가 따 갔음을 대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누구지?”

호영이는 앵두를 따간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꼭 먹어서 맛이 아니라 통통한 앵두를 즐겨보는 멋이 더 좋다고 호영이는 생각했는데 호영이의 이런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다음날엔 앵두나무 가지도 여기저기 꺾여 있었다.

“아니,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호영이는 익지 않은 앵두를 따 가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바로 그때 허리가 몹시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앵두나무 속을 파고들었다. 맞은 편 빌라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호영이는 그 할머니가 좀 야속하긴 했지만 워낙 연세가 지긋한 분이라 뭐라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가지를 꺾으면서까지 설익은 앵두를 따 가는 할머니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 날 보통 때보다 일찍 노루목 공원으로 운동을 나온 호영이는 계단을 올라다가 깜짝 놀랐다. 청솔모 두 마리가 앵두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앵두를 따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호영이는 숨을 죽이고 계단에 바짝 엎드려 두 녀석들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두 녀석은 가지 끝에 매달린 앵두를 먹기 위해 중간에서 이빨로 가지를 꺾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참으로 영리한 동물이었다. 가지를 꺾은 다음 매달린 열매를 손으로 따먹는 녀석들을 보고 호영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호영이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어제 그 할머니는…?”

호영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호영이는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저번처럼 그 할머니가 앵두나무 밑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할머니는 나무 아래 떨어진 앵두를 줍고 계셨다.

“할머니, 여기서 뭐하세요?”

호기심에 가득 찬 호영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응, 누가 익지도 않은 앵두를 자꾸 따가잖우. 가지도 다 부러뜨려 놓고…. 따다가 가지 흔들어서 땅에 다 떨어지고 말야. 땅에 떨어진 설익은 앵두도 하루 정도면 익거든. 그래서 줍는 거라우.”

순간 호영이는 뜨끔했다. 어제 청솔모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건 봤지만 할머니도 청솔모와 마찬가지로 설익은 앵두를 몰래 따간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호영이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시 할머니께 여쭤보았다.

“할머니, 그거 주어다 뭐에 쓰시게요?”
“웅, 술 담그려고.”
“시장에서 좋은 거 사다가 담그시죠 왜?”
“이 앵두나무 우리집 영감이 심은 거라우. 10년 됐지. 여기 공원 만들기 전 밭이었을 때 묘목 갖다 심었지. 공원 만들고 나서 또 옮겨 심은 거라우.”
“네, 그렇군요. 그런데 할아버지는요?”
“이 앵두나무 심고 3년만에 죽었다우. 꼭 이맘때지. 앵두열매가 처음 열어 막 물오를 때였지. 앵두 다 익으면 술 담아 먹어야한다고 좋아하며 노래 부르던 영감인데….”
“….”

할머니는 옛 생각이 났는지 잠시 한숨을 쉬었다. 호영이는 그제서야 모든 사연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이맘때면 이 앵두나무의 열매를 따서 앵두 술을 담가 그 술을 할아버지 묘에 한 잔씩 뿌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청설모가 먼저 나타나 설익은 앵두를 따가고 할머니는 녀석들이 따먹다 떨어뜨린 설익은 앵두열매를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깊은 사연도 모르고 할머니가 설익은 앵두를 따가고 그것도 모자라 가지를 꺾는다고 생각했던 호영이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또 한편 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나서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그날 저녁 호영이는 재래시장에서 잘 익은 앵두 한 되를 사왔다. 그리고는 할머니가 사시는 빌라 현관문 앞에 놓고 벨을 누른 다음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 이 글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윤태 기자 yuntae@eco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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